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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권보다 '구리'채굴권? <환경영화제-구리의 저주>

구리채굴권이냐, 생존권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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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리의 저주>의 배경이 된 곳은 세계적 생태분쟁지역 중 하나인 에콰도르 안데스 산맥의 후닌마을이다. 이 조용하고 평화로운 곳에 어느 날부턴가 캐나다의 탄광회사인 어센던트사가 구리채굴권을 확보하기 위해 자본의 힘을 빌어 마을을 -습격-하기 시작했다. 지역 주민들과 수 많은 환경단체가 마을을 그들의 횡포로부터 지켜내기 위해 수 년 째 운동을 벌여왔지만, 배부른 먹이를 눈 앞에 둔 하이에나들에게 이들의 순한 논리가 통할리 만무하다.

 
어센던트사와의 단 한 번의 공식적 논의도 없이, 무방비 상태로 당하기만 했던 지역 주민들의 분노가 극에 달했을 즈음, 드디어 지역 주민들은 어센던트사와 공식적인 첫 대면을 하게 된다. 물론 이들의 첫 대면에서 어센던트사의 논리는 모순의 모순을 거듭한다. 사장은 후닌 마을에 광산이 들어섬으로 인해 어느 정도의 환경피해는 확실하지만, 분명 마을 사람들에겐 더 많은 이익이 될 것이라고 이들을 설득한다. 또 마을 사람들이 그럼, 광산 개발의 조건부였던 5천 개의 일자리 제공은 확실한 거냐고 묻자 안타깝지만 그것은 책상에 앉아 대략적인 수를 뽑아낸 것에 불과하다고 말을 바꾼다. 결국 후닌 마을에 광산이 들어섬으로써 지역 주민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저 그들이 나고 자란 고향에서 자본가의 노예로 일하다 뿔뿔이 흩어져 죽거나, 또 다른 삶의 터전을 찾아 떠나는 것 뿐이다..



 자본가들의 한결같은 논리

영화에서 보여지듯, 모든 힘 있는 자들의 논리는 모두 매 한가지다. 약자들에게 절실한 당장의 밥벌이를 보장하고, 이를 조건으로 그들에게 가장 소중한(값으로 환산할 수 없는) 삶의 터전을 빼앗아버리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대운하 추진 사업이 동시에 떠오르는 것도 하등 어색할 게 없다.)

 

뿐만 아니라, 후닌 사람들이 광산은 곧 대재앙이라고 말하는 이유에는 지역 주민들이 겪어야 할 고통과 또 다른 차원의 문제가 걸려있다. 광산으로 변하기 위해 기계의 손을 빌린 그들의 숲은 28종의 야생동물들이 사라질 위기에 처할 뿐만 아니라 이로 인해 오염된 물이 용수자체의 위험을 야기하게 될 것이다. 결국 후닌 마을은 물론, 근방 지역의 모든 주민들이 위험에 처하고, 후차적으로는 대대적인 산림개간으로 지역의 사막화가 촉진될 수 있음을 환경전문가들은 경고한다.


자연을 대하는 두 개의 시선

과거부터 지금까지, 혹은 앞으로도 계속될 이같은 분쟁의 사슬엔 늘 서로 다른 두 개의 시선이 존재한다. 그것은 <구리의 저주>에서도 예외 없이 나타난다.

 

가령, 영화 속 후닌 지역 주민들은 땅은 곧 목숨이라고 말 하지만 반대로 탄광회사에게 그 땅은 그저 돈벌이의 수단에 불과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인간 세상에선 자본의 힘에 의해 수 만 명의 '목숨'보다 수 만 명의 '수단'이 더 우위에 서게 된다.


언제나 그렇듯, ‘힘이 있는 자들의 횡포는 저돌적이고 막무가내다. 과거에도, 지금도, 또 미래에도 이들의 목적은 그저 제 한 몸 배부르면 그만일 뿐이다. 백년, 천년 유지되어 온 삶의 터전과 동물의 생존권, 사람들의 삶과 행복 따윈 이들에게 돈으로 바꿀 수 있는 재산의 일부일 뿐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