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국민에게 애용되고 환영받는 물건으로 화폐만한 것은 없다. 이제 화폐는 단순히 거래하는 도구가 아닌 하나의 상징적인 도구이다. 그렇다면 화폐에 그려진 인물은 어떨까? 바로 한 국가가 시대적으로 어떤 인물을 존중하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이 될 수 있다.
하지만 현재 우리나라 화폐의 모델은 어떤가. 세종대왕, 이황,이이 그리고 이순신 모두 남성들이다. 단지 오천원권의 뒷면에 신사임당이 그린 그림이 들어가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것 역시 이이와 신사임당을 앞면으로 배치해서 여성을 단순히 아들의 어머니로서만 부각시킨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고액화폐에 여성 모델 등장한다
지난 97년도 문화미래 이프 잡지에서는 화폐의 주인공을 여성으로 하는 이미지를 실은 적이 있다. 전 방송위원이자 시인인 유숙렬씨는 ‘화폐에는 언제나 남자가 그려져 있다. 그래서 상상력의 차원에서 문제제기를 해본 것이었다. 그런데 상상력 속에서 한 이야기가 현실화됐다.’ 라고 말한다. 5만원과 10만원권 고액화폐를 발행하겠다고 밝힌 한국은행이 화폐 모델 중 한명으로 여성을 선정하기로 한 것이다. 지난 9월 본회의때에는 장향숙 의원에 의
해 고액 화폐권 여성 초상인물 선정 요청이 통과됐다.
▲ 독일 화폐 : 여성 음악가 클라라의 초상화, 이미 전 세계에서 여성인물을 화폐에 싣고 있다.ⓒ 문화미래 이프
그런데 고액 화폐 모델에 신사임당? 그건 안된다! ▲ 새 화폐에 신사임당이? ⓒ연합뉴스 ▲[교과서에 나오는 위대한 인물]'자녀 교육에 힘쓰는 사임당'
한국은행은 5만원과 10만원 고액화폐를 발행하겠다고 밝히고, 신권 화폐 모델 명단에 대한여론을 수렴했다. 그리고 각계 인사들과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를 통해 현재 김구와 신사임당 선정이 기정 사실화됐다.
여성화폐모델로 신사임당이 거론되자 문화미래 이프에서는반대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15일 ‘새 화폐 여성인물 어떤 여성이어야 하는가’ 라는 주제로 토론회를 열었다.
토론회를 주최한 문화미래 이프 엄을순 대표는 “ 이미 세계 여러 나라에서 여성인물을 화폐의 초상으로 사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야 여성인물 선택이 유력해진 것은 적극 환영할 일이다. 하지만 근대의 ‘현모양처’이념이 강하게 투영되어 있는 신사임당을 선정하는 것은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를 고착화시키는 것 " 이라고 성명서로 발표했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 김경애 원장은 " 1차 심사 때 내게 메일이 왔다. 20명의 모델을 제시했었는데 그 중에 19명이 남자고 1명만이 여자인 신사임당이었다. 그때부터 화가나기 시작해 한국은해 총장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우여곡절 끝에 부총장과 면담해서 20명 중에
반은 여성이 돼야하지 않겠냐며 따졌다. 그리고 유관순도 올라간다는 얘길 들었다."
현재 한국은행 측은 화폐모델 선정위원회가 누구인지 밝히지 않고 있다. 토론회에서는 형평성에 맞는 모델선정을 위해 선정위원회 성비를 밝힐 것을 촉구했다.
‘현모양처 모델’ 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의미를 파악해야
화폐는 국내에서만 통용되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에 통용되는 것이다. 그래서 화폐 속 여성은 우리 나라 여성의 대표를 내놓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이 시대에 어떤 여성이 이상적인가를 보여주는 표상이다.
김경애 원장은 “ 이 시대에 화폐에 현모양처를 상징하는 심사임당이 들어간다면 우리나라 얼마나 가부장적인 가치를 버리고 있지 못하는지를 전 세계에 내놓는 것이다.” 고 비판했다.
그렇다면 ‘현모양처’ 모델이 여성계에서 비판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나의 언어는 단순히 언어가 아니다. 즉 언어는 사람들의 의식이 덧대어진 역사물이다.
김신명숙은 말한다.
"현모양처라는 말 자체가 나쁜 건 없다. 다만 현모양처가 도대체 어떤 역사적 과정을 거쳐서 이상적인 여성이 되었는지 우리가 왜 그 여성을 지향해야 한다는 걸 배우게 됐는지 역사적 맥락을 알 필요가 있다"
지난 5월에 한국은행이 2009년 5만원권과 10만원권 지폐 발행을 예고하자, 율곡학회와 율곡평생교육원 등 신사임당 관련 단체들은 고액권 화폐의 앞면에 들어갈 인물 초상에 신사임당이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며 홍보활동에 나섰다.
이들 단체의 주장은 이러했다.
‘고액 화폐를 대할 때마다 자신의 재능을 스스로 개발한 21세기 여성상, 그림 속에서까지 어머니를 그린 효성스런 여인상, 남편을 입신양명케 한 어진 아내상, 백대의 스승을 낳고 기른 훌륭한 어머니상, 인구에 회자되는 여류 문인상, 정묘한 예술세계를 개척한 최고의 예술인상, 근검절약을 솔선한 참된 살림꾼상이 떠올라야 한다’ _연합뉴스에서 발췌
김신명숙의 말은 위와 같은 여성상이 허구이며 그것이 어떻게 여성을 억압하는지를 설명한다.
" 우리 근대 여성교육에서 현모양처라는 것이 이상적인 여성상으로 잡힌 것은 ‘일제식민지 교육’이다. 당시 남자들에게는 쉽게 부려먹을 수 있는 실업, 기능교육을 시켰고 여자들에게는 ‘현모양처’교육을 시켰다. 특히 일제식민지교육에 여자가 식견과 이론을 배운다면 일제에 저항할 것을 두려워했을 것이다. 바로 유관순 같은 사람이 많이 나온다. 즉 식민지 통제의 한 방법이었다. 인구의 절반인 여성을 그렇게 키웠다. 그렇게 키우면서 남자들의 저항도 족주의로 약화시켰다. "
그렇다면 같은 맥락에서 해방이후 독재정권에도 계속 현모양처 교육이 이어진 것이 정치권력의 의도가 있었던 것이 아니냐고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군부독재 정권의 입장에서 볼 때도 현모양처로 키우는 것이 역시 일제의 식민권력과 마찬가지의 의도로 국민을 통제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비판적으로 검증받아야할 가부장적의 폐해를 덮어두려는 의도였다."
" 해방이후 교과서의 ‘현모양처’ 신사임당도
그렇게 만들어졌을 것이다. 한국사회에 뿌리
내릴 가장 상징적인 여성인물로 신사임당이
된 것이다. 그 당시 권력을 쥐고 있던 교과서
집필, 여성교육 담당하던 사람들. 어떻게 핵
심적인 인물로 되었는가. 왜 식민지 시대와
똑같이 계속 받아들이게 됐는가에 대한 학문
적 탐구가 필요하다."
김신명숙은 " 만약에 지금 우리가 신사임당을 넣는다면, 식민지 잔재를 그대로 이어갈 뿐
아니라 강화하는 것이다. 만약 신사임당을
현모양처가 아니라 예술인의 면모로서 부각시키려한다면 그보다 훨씬 더 훌륭한 여성예술가들이 많다" 고 주장했다.
또한 여성문화이론연구소의 이숙인은 “신사임당이야 말로 딜레마적인 인물이다. 16세기를
살았던 신사임당은 실제로 조선시대가 원하던 인물은 아니었다” 며 “재해석한 신사임당을
알다면 남성들이 앞장서서 반대하지 않을까 싶다.” 며 신사임당에 대해 재해석한 연구를 제
시했다.
이처럼 새 화폐 여성인물 선정문제는 단순히 신사임당이 적절하고 안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 속에서 매장됐던 여성들을 재발굴하고 후대에 의도적으로 왜곡된 여성
들을 재해석할 필요성을 시사한다고 볼 수 있다.
새 화폐의 여성상은 이래야 한다
토론회 참가자들의 주장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
▲ 선정위원회를 밝히고 있지 않다. 적어도 성비는 밝혀야 한다.
▲ 여론조사에 의지하지 말아라. 지금까지 여성교육이 너무나 잘못돼왔기 때문에 일제시대 현모양처 교육이 이어져오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신사임당밖에 없기 때문에 신사임당 밖에 없다. 제대로 된 연구와 토론이 필요하다.
▲ 그렇다면 새 화폐의 새로운 여성상은 어떤 기준을 잡아야 하는가
1) 어머니나 아내 이전에 개인으로서의 존엄과 고유한 삶을 살 권리를 갖는 주체성을 가진
여성. 2)가정의 울타리를 넘어서 즉 가족이기주의를 벗어나 시민사회 시민으로서 공동체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3)공공적인 활동을 하되, 현재 가부장제 사회의 병폐와 해악을 없앨
진취적인 인물이어야 한다.
며 대안으로 유관순, 나혜석, 김만덕 등이 제시됐다.
'화폐모델 선정, 급하지 않다'
새 화폐의 여성인물 문제를 둘러싸고 말들이 많다. 국회에서는 국정감사가 끝나는 19일 이후에 화폐모델을 발표하겠다고 밝혔다. 현재 어느 단체에서든지 특정한 인물을 화폐로 내세우는 것은 조심스러워하고 있다. 일부 여성계에서 화폐모델문제에 대해 다른 여성문제보다 중요하지 않다며 별 관심을 두고 있지 않기도 하다. 하지만 화폐에 어떤 모델을 삼느냐의 문제는 단순히 훌륭한 역사 속 위인을 골라내는 것이 아니다. 어떤 인물을 고르느냐는 시대의 사회인식을 반영해주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시점에서 더욱 세심하고 신중해져야 한다. 그 누군가의 말처럼 ‘교육받은 역사적 여성 인물들에게서 여성의 욕망을 읽을 수는 없다. 단지 남성만의 욕망만을 읽을 수 있을 뿐이다.' 사람들 의식의 문제가 해결돼야 사회의 여성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
불거진 새 화폐 여성인물 논의가 날치기로 정해지지 않고 신중히 토론될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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