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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우리에게 죄는 없을지라도 '책임'은 있다


아우슈비츠의 생존자 쁘리모 레비, 이탈리아계 유대인인 그가 겪은 끔찍한 경험.
아우슈비츠에서 그는 인간이지 않았고, 인간이라고 태어난 그는 끔찍한 경험이 가져다 준 혼란 속에서 ‘이것이 과연 인간인가’라는 고민으로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독일이 패전하고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온 레비는 생각보다 긍정적인 모습으로 생활했다.
그러던 그가 돌연 자살했다. 그의 죽음은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바로 전날까지도 아무렇지 않게 지내던 그가 돌연 투신해버린 것이다.
그가 그냥 ‘살아갔다면’ 희미하게 잊혀졌을 인간의 잔인함이 그의 자살로 사람들의 마음을 다시금 죄책감에 흔들어 놓았다. ‘이대로 살아가도 괜찮은 것인가’ 

자살은 부조리한 것이긴 하나 허튼 짓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살의 부조리성이 삶의 부조리성을 증대시키는 것이 아니라 감소시키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살을 정당화해도 좋은 최소한의 이유는 자살이 우리가 고뇌하는 삶의 허위, 또 그 허위 때문에 고뇌를 견뎌낼 수 있는 삶의 허위를 거두어들인다는 것이다. (자신에게 손을 내밀며, 장 아메리)

아우슈비츠의 몇 안되는 생존자였던 장 아메리가 돌연 이 글을 쓰고 자살한 후 레비 역시 얼마 안 있어 자살했다. 그는 분명 장 아메리의 자살에 대해 비판했었다. 하지만 그도 결국 자살했다.

그의 자살은 단순히 지난 고통스러운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은 아니다.
쁘리모 레비가 쓴 ‘아우슈비츠는 끝나지 않았다’는 책의 제목처럼, 그는 여전히 사회 곳곳에서 인간을 잠식하는 끔찍한 반인간적인 것들에 몸을 떨었으리라. 그래서 그 자신이 온전히 상처가 되어 사람들에게 드러낸 것이다.


나는 '아우슈비츠'가 단순하게 우리에 대한 도덕적 경종으로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근대에 기인하며, 지금도 현실 그 자체에 내재한다. 제국주의와 식민지 지배는 '일부 인간은 인간이하'라고 하는 사상, '인간은 비인간이다'라는 원리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그 시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러는 한 '아우슈비츠는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 서경식)
 


"그리고 지금, 여기, 우리"



얼마 전 건설노동자 정해진씨가 분신을 했다. 그가 자신의 몸에 불을 붙이면서 한 외침에 우리는 얼마나 귀 기울이고 있는가. 그토록 고통스러운 죽음인 분신을 택하여야만 했던 고뇌에 대해. 삶을 경외할 수 있는 자들이라면 자신의 몸에 불을 붙여야만 했던 그의 고뇌에 대해서 머리를 숙일 것이다.

파시즘은 그저 히틀러만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그것에 동조하거나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혹은 무관심했던 대중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그의 죽음이 우리들과 무관하다고 할 수 있을까. 부조리한 현실에 대해 이게 현실이라는 패배감, 내가 아닌 일에 대한 무관심, 무지함. 이런 것들이 '먹고 살기 힘들다' '사람답게 살고 싶다' 같은 불평을 만들었다. 우리의 책임이다.

오히려 노동자의 분신 사건이 많아질수록 우리의 책임감이 무뎌질까 두렵다. '그러려니'하는 태도가 만들어낼 악순환.

시간이 흘러 시대는 변했지만 비인간적인 모습은 또 다른 얼굴로 우리의 도처에 있다.
인간의 고통은 절대적일 수 없다. 특히 사회가 주는 고통은 그렇기에 어떠한 기준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을 것이다.

쁘리모 레비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정해진씨의 죽음이 떠오른 건 우연히 아닐 것이다.
이 사회는 이미 자해를 시작한 듯하다. 견딜 수 없는 고통에 스스로 제 몸에 상처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사람들이 자꾸만 죽는다. '살고 싶지만' 자신을 죽여야만 하는 사람들.  
 
우리는 폭력을 느껴야만 한다. 누군가의 자살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한다.
쁘리모 레비의 '인류는 나아지지 않았다'는 초조함이 아직 느껴진다.
그의 죽음에 대해 비록 우리에게 ‘죄’는 없을지라도 ‘책임’은 있다.



오산이 기자(ymjang@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