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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등록금은 자식을 패륜아로 만들고 있다

등록금 문제가 왜 대학에서 패잔을 거듭하는가.

3월 16일 청와대 앞, 숭실대 총학생회장의 눈물


3월 16일, 숭실대 총학생회장을 비롯해 5명의 총학생회장들이 청와대 앞에서 등록금 문제해결을 위한 삭발을 진행했다. 한해 천만 원을 훌쩍 넘은 등록금 때문에 수많은 서민들이 고통을 받고 있다. 물가인상률 1위가 등록금인 만큼 최근 각종언론에서 집중보도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각 대학들에서 진행하고 있는, 등록금 문제 해결을 위한 활동은 이상할 정도로 보이지 않는다. 지금 당장, 뚜렷한 해결책 없는 상황에서, 매년 반복되고 있는 ‘개나리 투쟁’에 대해 집중 조명해 보기로 했다.

학생회를 중심으로 하는 등록금 문제는 사립대를 중심으로 90년대 후반부터 등장하기 시작했다. 89년 대학자율화 조치 이후 등록금이 물가인상률을 상회하면 지속적으로 오르다가, 2000년부터 등록금 600만원시대가 열리고 마침내 1000만원 돌파하게 됐다. 학비를 못 대서 자살을 하는 등, 극단적인 상황으로 서민경제를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문제의 중심에 등록금이 자리 잡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학생회를 중심으로 하는 등록금 투쟁은 내부적인 역량의 약화와 학교당국을 상대로 하는 접근의 한계로 큰 성과를 보지 못했다. 이러한 한계를 딛고 2000년대 초반을 지나 본격적으로 전국의 학생이 모여 정부를 대상으로 하는 운동을 전개한다. 하지만 이 역시 몇 천 명 모이는 정도를 크게 벗어나지 못했으며 이내 4월이 지나면서 등록금 투쟁은 실패로 돌아가고 ‘개나리 투쟁’이라는 오명을 쓰게 됐다.

현상적으로 나타나는 문제는 학생회의 역량이 부족해 진 것인데, 이것만으로 설명은 부족하다. 학생들이 떠안고 있는 고통의 무게가 커지면 커질수록 그들의 저항은 높아가는 것이 이치이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CPE철폐 경우에도 학생들의 저항은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격렬했다. 등록금은 법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당장의 먹고 살 문제까지로 평가되고 있는데, 왜 대학가는 조용한지 의문이다.

내 고통이 아니라 부모의 고통이기 때문

대부분의 학생들은 학자금 대출을 받거나 부모가 등록금을 낸 것으로 학교를 다닌다. 5천만원에 가까운 학자금을 담당하고 있는 당사자는 지금의 학생이 아니라 부모인 것이다. "학자금 대출을 받는 것은 학생이니, 직접적인 당사자이지 않느냐" 는 질문을 던질지 모르겠지만, 현재의 학생들은 대출을 갚지 않는다.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한 책임의 소재는 현재의 학생이 아니라 학부모며 5, 6년 후 미래의 학생이다.

이 과정에서 피부로 느끼는 고통의 당사자는 부모가 되며 학생은 2차적 당사자가 된다. 이 상대적 거리감은 학생들 스스로 등록금 책임의 소재를 자신에게서 부모에게로 이전시키는 과정으로 발전한다. “나중에 취직해서, 성공해서 갚자” 혹은 “비록 힘들겠지만 부모님이 해결해 주겠지, 나는 공부 잘 하면 된다” 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정부차원의 해결이라든지, 사회 근본적 해결이라든지 앞장서서 해결해 볼 노력은 자연스레 뒷전으로 밀리는 것이다.

또 4년제 대학에 입학하면서부터 극빈층은 대학사회에서 아웃된다. 월수입 200만 원 이상인 부모의 자녀만이 대학에 입학하고, 나머지 극빈층은 대학을 포기하고 생업전선으로 바로 뛰어든다. 처음 시작부터 한 번의 필터링을 거치고 입학한 이들은 학자금 대출을 받거나 등록금을 분할납부 하더라도 등록금을 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등록금을 낼 수 없는 가정형편이라도 자식에게 부모가 자신의 고통을 토로하지 않는다. 그저 “넌 아무 걱정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해” 라고 말할 뿐이다. 부모는 이런 존재다.

‘자신의 몸을 팔아 자식의 학비를 대는 어머니의 기사’를 보며 하늘 높은지 모르고 치솟는 등록금은 의도하건 의도하지 않건 자식을 패륜아로 몰아가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취업도 제대로 되지 않는 자식에 대해 기대를 걸며, 하루하루 보릿고개를 넘어가는 것이 오늘의 부모상이다.

고통의 del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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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의 절규

7%가 넘는 학자금대출을 다섯에 세 명은 받는다. 이자를 갚기 위해 알바나 과외를 하는 친구들, 4학년과 졸업생들은 원금을 상환하기위해 분주하게 뛰어다닌다. 비싼 등록금도 모자라 등록금을 마련하기위해 빌린 대출을 갚아가야 하는 실정이다. 취업을 위해 고군분투해도 될까 말까한데, 돈까지 벌면서 취업의 문을 두드리고 있고 취업을 해도 등록금을 갚기 위해 정신없다.

1학년 때부터 등록금 대출을 받지만 등록금이 상환되는 것은 4학년이거나 졸업생일 때다. 이 잠깐의 간격으로 등록금 고통은 delay가 된다. 대신 그만큼 4학년이 되면 취업의 압박과 등록금 상환으로 스트레스는 극에 달한다. 취업이라도 제대로 되지 않으면 그 고통은 더욱 배가 될 수밖에 없다. 취업준비생 대다수가 우울증에 걸리고 자살하고픈 충동을 느낀다는 사실은 어찌 보면 당연한 상황이다.

등록금이 없어서 휴학하는 것은 큰 고통은 아니다. 휴학을 하는 것이 이제는 일반적이고 역설적으로 졸업시기를 늦추는 것이 고통의 delay가 늘어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일년동안 아르바이트해서 돈을 모아 다시 학교를 다니면 된다. 노동자가 해고되면 먹고 살 길이 없기 때문에 복직하기위해 모든 것을 걸고 노력하지만 대학생에게는 며칠의 delay가 주어지는 것이다.

대학은 과거와 다르게 변했다. 대학의 낭만은 사라지고 대학생인데도 학원수업을 들어야 하고, 고등학생보다 더한 스트레스를 받으며 바쁘게 쳇바퀴를 공전하고 있다. 반드시 직면하게 될 고통의 미래를 안고 있지만 이것을 벗어날 해결책은 보이지 않는다. 이처럼 한국사회에서 실용적으로 변한다는 것은 슬픈 현실을 직면하게 된다는 것과 동일하다.

등록금 문제의 본질적 해법을 향해

우리는 초중등 12년의 교육을 받으면서 개인의 성공이 ‘善’이라 여겨왔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나’는 누구보다 앞서가야 했다. 왜 가야하는지도 모른 체, 성공으로 향하는 구멍이 좁혀지고 있는 것을 알고 있지만, 남들보다 더 높고 빠르게 달려 가야한다. 좁아지는 구멍을 넓이는 것이 본질적 해결이지만 현실에서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문제로 치부된다. 

학생회에서 ‘민주적 절차로 등록금은 투명하게 책정되어야 한다’ ‘학생복지를 위해’ ‘등록금 인상율이 너무 높다’ 등의 논리들을 펼치며 학생들의 참여를 호소한다. 그러다가 잘 안되면 등록금 투쟁을 접는다.

민주적인 문제가 해결되면 등록금문제가 해결되나? 학교시설이 좀 낳아지면 문제가 해결되나? 현실적 상황과 본질적 문제에 대한 고려없이, 여론에서 말하는 경제적 상황을 그대로 붙여넣기 하고 있는 선전과 논리가 오히려 학생들의 분출구를 가로 막고 있지는 않을까. 비록 뚜렷한 해결책이 없다고 하더라도 닫히고 있는 문을 열기위한 것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해 볼 때가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