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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어느 대학 ‘호칭’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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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년 만에 복학을 했다. 03여비역(여자 예비역)소릴 들으며 소수의 복학생들과 학교를 다니다 05학번과 인사를 하게 됐다. 그런데 그 05학번이 “나도 84년생인데 말 놔도 되지?”라는 말을 했고, 순간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말년에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03학번 때는 재수, 심지어 삼수를 한 애들에게도 말을 놨는데. 오랜만에 온 학교에선 갑자기 어린애들이 동기간에 ‘언니, 오빠’라고 부르고 나이가 같은 선배에게 말을 놓다니. 이게 무슨 말세인가.
-어느 여비역의 이야기


 
 이 얘기를 듣고 ‘저런 개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그런데?’라는 반응을 보일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인식의 차이를 만드는 건 바로 ‘호칭’ 나이를 기준으로 삼는 학번과 학번을 기준으로 삼는 학번이 만났을 때 생긴 가치관의 혼동. 이건 비단 이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많은 대학생들이 호칭문제 때문에 고민을 많이 하고, 실제로 이 때문에 속상하는 이들은 인터넷 카페, 클럽에서까지 이런 ‘호칭’고민을 털어놓는다.

 아직까지 ‘학번제’가 잘 유지되고 있는 학과도 있겠지만, 최근 몇 년간 ‘학번·나이 혼용제’가 트렌드처럼 번지고 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이유가 뭔지 그리고 배경은 뭔지 파악하고 싶어 조사를 한번 해봤다.


08학번 “같은 학번인데 일단 몇 년생 인지부터 물어보게 돼요.”


이건 기본 재수부터 86년생까지 다양한 연령대를 자랑하고 있는 08학번들의 생각. 고등학교 때는 같은 나이대만 만나다 대학에서 다양한 나이 스펙트럼에 일단 몇 년생인지 확인한 후 같은 나이를 만나면 반가워하는 현역08들. 재수를 한 08학번도 나이가 같은 선배더라도 기본으로 ‘선배’라는 존칭을 쓰고 좀 친해지면 사적인 자리에서 상호 합의하에 말을 편하게 한다고 한다.

“일단 같은 학번인데 몇 년생인지 조심스럽게 물어보죠. 그리고 나보다 많으면 존칭 쓰고, 같으면 그때부턴 편해지는 거죠.”
“제가 재수했는데 나이같은 선배에게 형이라고 하진 않고 ‘선배’라고 하고, 좀 친해지면 서로 합의하에 말을 놔요. 그래도 다른 선배들 있을 땐 말을 안 놓죠.”
“그런데 이럴 땐 고민돼요. 같은 08인데 재수한 형이랑 친해져서 ‘형, 뭐 했어?’이러고 있는데 옆에 애들이 그 형한테 존댓말하고 있으면... 왠지 나도 그래야 할 것 같은 분위기랄까?”


이런 말을 하면서 너는 액면가로 하면 89학번이라면서 쇼를 보여주는 08학번. 별 생각 없어 보인다. 너네 그렇게 심각한 애들은 아니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03·04학번 “나이 학번 다 부질없어. 어짜피 군대 갔다 오면 다 친구되는 건데... 그래도 들어오면서부터 말 놓는 건 개념이 없는 거지.”

“군대 갔다 오고 몇 년간 친해졌으면 자연스럽게 말 놓게 되던데?”
“어짜피 다 친해지는 것도 아니고 몇 번 보고 말 사이인데 그런 문제가지고 싸우는 것도 웃긴 것 같다.”
“친해지기도 전에 나이가지고 선배한테 말 놓는 건 개념이 없는 거지.”


단대건물 앞에서 햇볕 쬐며 담배피고 있는 예비역 03과 04의 생각. 우리 과의 학번제가 무너졌던 시초인 04학번과 사실상 마지막 학번제를 살았던 재수 03. 학교 들어와서 형이라고 하는 거, 선배와의 호칭 문제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가를 말해줬다.


02학번 “과에 들어왔으면 과공동체의 룰을 따라야지. 이게 다 선배가 못 가르쳐서 그런 거야”


선천적 노안 때문에 빠른 84였음에도 조교라는 소릴 들으며 학교에 들어왔던 02학번 예비역의 생각.

“군대에서도 빠른 군번이 있잖아. 내가 7월 빠른 군번이더라도 내 동기는 7월 마지막에 들어온 애지, 3일 차이나는 6월 군번이 아니란 말이야. 실제로 3일 차이나도 6월 군번은 선임이라고. 학교도 똑같지 빠른 생일로 나누고, 현역으로 나누고, 재수에서도 빠른 애들로 나누고... 이게 무슨 의미가 있어. 그럼 윗학번들에겐 뭐라고 불러야 하는데. 이런 식으로 나누면 호칭에 대한 문제는 끊임없이 발생하지. 거기다가 이렇게 정하는 건 개인의 규칙이지 전체의 규칙은 아니잖아. 이래서 공동체가 정해주는 규칙이라는 것이 필요한 거야. 우리 때는 선배들이 호칭문제는 이렇게 하라고 강의실까지 와서 가르쳐줬어. 이건 나이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어떤 공동체에 속해있느냐의 문제잖아. 이걸 애들이 모르고 계속 학번 간에 나이문제로 시끄러운 건 선배들이 공동체에 대해서 가르쳐준 게 없어서 그런 거야. 선배들 잘못이지. 그건 과 공동체에 속해 있는 사람들, 그리고 나보다 먼저 들어온 사람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야”


가장 중요한 건 서로를 존중해주는 태도


오늘도 어김없이 호칭 때문에 술자리에서 불편한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솔직히 나이나 학번은 중요하지 않다. 나이나 학번이나 ‘권위적’이라는 탈을 쓰게 되면 누구나 불편하게 느끼는 건 사실이니깐. 좋은 관계를 만들기 위해 가장 잘 맞는 호칭의 기준은 위의 두가지 이전에 ‘존중’의 원칙일 것이다. 이런 걸 제대로 만들지 못하고 있는 현재 대학의 과 공동체에 대해 조금 안타까운 마음은 접어두고, 새내기들뿐만 아니라 모든 학번들이 서로 존중받을 수 있는 관계를 만들어갔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정윤정기자(babymv@on20.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