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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광우병은 자본주의식 탐욕의 결과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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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육을 먹고 자신이 먹은 인간의 혼령 때문에 미친 듯이 웃어대다 죽는다는 ‘래핑맨’의 이야기를 들어본 적 있는가? 문화별 차이는 있지만, 래핑맨이 자주 나타나는 지역에서 식인의 의미는 식량부족보다는 부족 혹은 성의 우월성 등으로 나타난다. 단순히 정복지에서 우월감을 나타내기 위해, 혹은 대상의 정신(spirit)을 취하기 위해 인간의 인육(특히 뇌)을 먹었던 것이다. 필요이상으로 인육을 취했던 죗값은 다시 행위 주체(식인을 했던 이들)에게 돌아갔다. 이들은 인간 최후의 금기를 어긴 대가로 치매와 신체마비증상을 보이며 죽었다. 이처럼 인간의 탐욕은 예전부터 자기파멸의 모습으로 인류에게 ‘금기시 되어야 할 지나친 욕심’에 대한 경고를 동시에 안겨 주었다.
 
지금의 탐욕은 어떤 모습을 띄고 있는가

 17세기 이후 자본주의 사회 속 탐욕은 개인의 탐욕과는 차원이 다르다. 기존의 탐욕이 개인의 집착, 우월감, 정신 등으로부터 시작되었다면, 지금의 탐욕의 근원지는 한 곳으로부터 시작된다. 바로 ‘자본’ 그 자체이다.
 자본은 자기 자신이 탐욕의 근원지이자 목적이 된다. ‘이윤추구’를 기본원칙으로 운영되는 이 자본주의 사회는 이윤이 된다면 그 어떠한 물건도 진열대에 올려놓으며 최대의 가치를 뽑아내기 위해 머리를 굴린다. 이 과정 속에서 지켜야 할 몇몇 가지 사회원칙(안정성, 환경보호, 노동자 인권 등등)들은 도움이 안 될 때는 과감하게 생략한다. 
 그 원칙을 지키지 않은 대가는 여태껏 인간이 겪어왔던 것의 상상을 초월한다. 그 중에서 가장 무서운 건 죄의 대가가 ‘인과율’을 무시한다는 점이다. 돈을 아끼기 위해 폐수를 흘려보낸 공장주는 멀쩡하지만, 그 동네 사는 아무개 씨는 시름시름 앓다 죽는다. 문제 있는 소고기를 파는 업체는 멀쩡하지만 먼 동네에서 사는 아무개 씨는 광우병에 걸려 죽는다.
 
자본의 탐욕이 광우병을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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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피니언 포스트

 미국에서 생산되는 소고기의 99%는 대기업에서 생산된다. 타이슨 등으로 대표되는 미 축산업체들은 최소비용으로 최대의 이윤을 만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들이 키우는 소들은 자기네 동족, 닭, 돼지의 부사물로 만든 ’동물사료‘를 먹고 자란다. 세계에서 공식적으로 동물사료 사용이 금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에서는 한 단계를 건너 뛴(소-닭·돼지-소) 사료섭취에 대해선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좁아터진 공간에서 고기를 먹고 자란 소들은 풀을 먹으며 자란 소보다 짧은 시간에 몸집을 불리게 되고, 운동량이 적기 때문에 고기도 상대적으로 연하게 된다. 이른바 ’잘 팔리는 고기‘로서의 소가 생산되는 것이다. 이는 ‘버리는 것도 돈이고, 먹으면 빨리 큰다는데 그깟 광우병 때문에 이익을 포기할 수 없다’는 업계의 생각 때문이다. 광우병 논란이 일어 미국 내에서 소고기 소비가 급격히 줄어들곤 있지만, 이는 근본적인 해결이 되지 못했다. 매출이 떨어진 이 거대한 기업들은 만만한 나라에 다시 소고기에 대한 압박을 넣기 시작한 것이다.(국무장관이 직접 방한해서 ‘소고기’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건, 그림이 다소 웃기지만)상대적 약소국가들은 이 탐욕의 결과물을 울며 겨자 먹기로 먹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제 광우병의 문제는 종과 국경을 넘어서 존재하게 되었다.
 
탐욕의 절정 - 소는 ‘스테이크’를 먹고, 사람은 굶는다

 소 한 마리가 한 달 동안 소비하는 곡물량은 인도인 두 명이 1년 동안 먹고 살 수 있는 곡물의 양보다 많다. 소가 이렇게 나름대로 호강스러운 생활을 하며 병에 걸리고 있을 때 지구 반대편에선 고기 한 점은커녕, 옥수수 한 알도 제대로 얻지 못하고 아사하는 사람들도 있다. 소의 창자이든, 소가 먹는 옥수수든 간에 이는 배고픈 이에게 돌아가지 않는다. 소는 먹여서 고기로 팔수 있지만, 아프리카 사람들은 고기로 팔 수 없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인류가 더욱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는 말로 사람들을 현혹시키면서 사람을 소보다 못한 동물로 취급하고 있다.

 간디는 나라가 망하는 징조로 ‘인간성 없는 상업’과 ‘도덕성 없는 과학’을 들었다. ‘도덕성 없는 과학’을 인간성 없이 사람들에게 팔고 있는 지금 시점에 가장 잘 들어맞는 표현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