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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20대를 지배하는 IMF, '기억의 공포'

97년 대한민국의 겨울은 국민들에게 ‘IMF 위기’라는 혹독한 추위를 안겨주었다. 외부적으로는 국민소득 1만 달러 시대에 돌입하며 아시아 경제대국으로 도약하는데 성공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내부적 경제 상황은 외환보유고 관리 실패와 전체 채무의 50%를 넘어선 단기 외채의 급증으로 파산 직전의 상태였다. 97년부터 시작된 국내 대기업들의 잇따른 부도와 동아시아 지역의 경제적 붕괴도 외국이 국내에 투자된 자본을 회수에 가도록 하는데 일조했다. 결국 정부는 기업과 금융기관의 단기외채를 해결키 위해 IMF(국제금융기구)에 구제금융을 신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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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가 닥쳤던 97년 11월 한 달 동안 실업률 증가폭이 15년 만에 사상 최고치를 기록하며 12만 명에 달하는 실업자들이 거리로 내몰렸다. 1998년 자살율 역시 전년도인 6022명보다 42.3%(2547명)나 급증했다. 실제로 2007년 MBC 스페셜에서 방영된 ‘그 배는 어디로 갔나’에서는 충청은행 강제 퇴출자 945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응답자 중 85.9%가 자살충동을 느낀 적이 있다고 답했다. 또 당시 IMF는 우리나라 빈민층의 구성이 외환위기 전인 15.7%에서 최고 28.7%까지 늘어날 것이라고 전망키도 했다. 이름조차 생소했던 IMF, 그 위기가  국민들의 목을 무겁게 옥죄어 오던 그 때를, 지금의 20대는 과연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1997년 IMF, 20대들의 기억

“저희 아빤 공무원이라 괜찮으셨지만 친구들 중엔 그 때 돈이 없어서 급식을 못 먹는 애들이 있었어요
. 그래서 친구들이 선생님께 말해서 그 아일 도와줬던 기억이 나요.” –손00 23 -

“어렸을 땐 막연하게 비정규직이 되면 안 되겠다 라는 생각을 했어요. 아버지는 괜찮으셨는데, 그 주변에 비정규 직이셨던 분들이 IMF 때 다 정리해고를 당하셨거든요.” –박00. 26-

“그 때 학교에서 무슨 설문 조사를 했는데, ‘아빠가 회사를 안 다니고 있는 사람은 손을 들라’고 했던 기억이 나요. 40명 중에 한 10명 정도가 손을 들었던 것 같아요.” –이00 20-

20대들이 근 10년 전의 경험을 이렇게 공유할 수 있는 이유는 그만큼 당시의 기억들이 이들에게 지우지 못한 경험의 ‘일부’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 중에는 친구들이나 언론을 통한 간접적인 영향보다 더 직접적인 경험으로 IMF의 어려움을 기억하는 학생들도 많았다.

IMF이후로 아버지가 줄곧 일을 구하지 못하셨어요. 대학도, 누나가 자기 꿈 포기해가면서 보내 준 거라, 그 생각하면 제가 어떻게든 꼭 성공해야겠단 생각이 들어요.” 00 21-

아버지가 철강회사를 다녔는데 IMF때 거기가 완전 부도가 났거든요. 그 충격으로 아버지가 쓰러지셨던 기억이 나요. 어린 마음에 우리가 이렇게 힘들어진 게 다 아버지 때문이라고 원망도 많이 했죠." – 00. 23. -

20대를 지배하는 IMF의 흔적

어린 시절 겪은 IMF의 경험은 이렇게 직, 간접적으로 20대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이런 기억들은 20대에게 IMF위기라는 국가적 위험 속에서도 여유롭게 살아남은 자들과 벼랑 끝까지 내몰리게 된 자들이 극단으로 나뉘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했다. 강행된 구조조정 속에서 낙오된 가장들은 무능력한 죄인처럼 움츠려 들었고, 살아남은 자들은 능력 있는 가장으로 인정받았던 현실을 지켜봤던 20대. 당시 전남대 의과대학 최영 교수는 "가정 불안 최대의 원인은 가장의 실업이며, 그로 인한 가정 불화와 폭력, 이혼이 증가했다. 더불어 부모의 실직 가능성에 대한 아이들의 불안도 늘고 있다"고 전했다. 개인의 가치관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 '유년의 기억'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20대의 경제적, 직업적 가치관에 ‘안정성’이라는 키워드가 최우선적인 가치로 자리 잡게 된 것은 필연이었을 지도 모른다.

2005년 새내기가 된 한 학생은
“대입 원서 쓸 때 학교에 소위 TOP 이라고 불리는 애들은 모두 교대에 지원했어요. 유독 저희 학번 때 교대와 사범대가 인기 학과였죠. ”라고 말했다. 단국대 07학번 미연씨도 당시의 기억과 맞물린 현실을 이렇게 설명한다. “가장 가까운 가족들이 멀쩡하게 다니던 회사를 잘리니까 그 동안 호황기를 겪고 있던 우리로서는 좀 당황스럽고, ‘아, 돈 없으면 희망도 없구나. 고수입도 좋지만 ‘안정적’인 직업을 더 선호하게 된 거죠.” 올 해 법대에 진학한 이모양도 “사법 고시는 계속 준비할 생각이지만, 해보다 안 되면 (공무원) 7급을 준비하지 않겠느냐”며 ‘25살 까진 7급, 28살 까진 9급’을 준비하는 게 학과 내 통설이라고 얘기한다.

요즘 20대들이 직업 선택에 있어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가치는 바로 ‘안정적 삶’이다. 자신이 얼마나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과 노력보다는 ‘얼마나 안정적인 생활이 보장 되는가’가 더 중요해져 버렸다. 왜냐하면  IMF는 개인이 얼마나 열심히, 얼마나 힘든 삶을 살아왔느냐 하는 것과는 무관하게 사회적 약자부터 차례로 침몰 시켰기 때문이다. 우리네 아버지가 그랬고, 거리로 내 몰린 수 많은 실업자들이 그랬다. 결국 20대들이 목격했던 IMF라는 국가적 위기 속에서는  국민 개개인이 그들 스스로의 역량만으로는 결코 살아남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20대가 IMF라는 기억의 공포 속에서 '개인의 스펙과 능력'만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하게 된 이유는 몰락한 가정과 파멸된 개인이 아무런 사회적 보호 없이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대로 방치되어 왔기 때문이다.

다시 10년이 지나 2018년이 되었을 때, 2008년 우리들의 모습이 기억 속에 어떻게 남아 있을 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다만 그 때 기억될 우리의 모습이 단절된 도서관 속에서 홀로 잠들어 있는 개인 개인이 아닌, 지금 거리로 쏟아져 나온 촛불처럼 하나된 불빛으로 기억될 수 있길 바랄 뿐이다.


공동 취재
    문하나 ON20기자
                김아미 ON20인턴기자
                윤혜진 ON20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