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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라는 건 인간에 대한 하나의 관점을 보태는 것이다’


- 7일 국민대학교에서 열린  은희경 작가 특강


“비가 오니 숨쉬기가 낫네요” 이렇게 말을 꺼낸 그녀는, 건조한 세상에 촉촉하게 물을 뿜어 주는 사람 같았다.
그녀, 소설가 은희경.


소설가는 자신의 이야기로부터 소설을 쓴다. 소설은 한 작가의 세계관이 담겨 있다. 그래서 ‘문학을 쓰는 것은 나를 이해하는 과정이고, 문학을 읽는 것은 인간을 이해하는 과정’ 이라 한다. 즉, 작가가 자기 삶의 일부를 떼어 만든 소설은 결국 인간을 더 넓게 이해하도록 해준다. 그녀가 말한 것처럼, ‘문학이라는 건 인간에 대한 하나의 관점을 보태는 것’ 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소설을 많이 읽는 사람은 착할 거라는 생각. 소설 속에 드러난 한 사람 한 사람의 삶들을 읽어 내려가면서 다양한 삶을 이해하게 되니까 말이다. 그것은 곧 일반 사람들은 시선에 담지 못했던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감수성을 키워준다.


그래서 은희경 작가는 말한다. “소수자를 대할 때, 그들을 시혜해야 한다는 측면이 아니라 fair 즉 공정이라는 측면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공정, 공평하고 올바른 것. 적어도 모든 사람들이 공평한 환경 위에서 나름의 생활할 수 있도록 서로 배려하는 것. 그건 상식일 것이다. 소수자를 배려하지 않은 사회는 ‘반칙’을 하고 있는 것일 지도 모른다. ‘반칙’은 상식적이지 못한 일이지 않는가. 또한 한 사람은 한 가지색으로만 물들어 있지 않으므로, 세상에 ‘반칙’ 있는 한, 그 어느 누구도 소수자가 아닌 사람은 없다. 내가 백인,남자,지식인으로 기득권자라 해도 오늘 저녁에 갑자기 장애인이 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요즘은 대학생들이 다들 실용서를 많이 읽죠. 바로 취업준비에 도움이 되기 때문일거예요. 그래서 문학작품 읽는 데는 소홀하게 되는 것 같아요. 하지만 문학작품을 읽는 자와 안읽는 자는 분명 차이가 있을 거라 생각돼요. 그건 바로 ‘섬세함’일 것입니다.”

섬세함이라 하면 생각이 복잡하고 소심한 사람이라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생각이 복잡하고 소심한 것이 나쁜 것일까. 오히려 남을 배려할 수 있는 감수성을 가진 섬세함은 큰 미덕이라 할 수 있다.


“쿨해야만 한다고 해요. 세상을 잘 살아가려면 쿨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하지만 인간의 본성은 뜨겁습니다. 애써 쿨한 척 하기보다 내 상처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상대방의 입장, 성격을 이해하는 이성적인 태도를 지녀야 합니다. 그건 바로 타인에 대한 배려와 감각을 가지는 것이고, 이러한 섬세함은 문학을 통해 일깨울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럼 그녀는 어떻게 소설을 쓰기 시작했을까? 그녀의 소설은 덮어둔 상처를 드러내거나, 보고 싶지 않은 삶의 그늘을 보게 만든다. 그녀 소설을 보는 것은 고독과 고통을 마주하는 일이다. 그녀의 표현처럼 그녀는 애써 덮어 놓은 세상의 모든 뚜껑을 열어 보려 하는 것 같다. 무엇이 그녀로 인해 소설을 쓰게 만들었을까?

그녀는 모범적인 삶을 살려고 했다. 교육 받은 인생 메뉴얼대로 공부하고 취직하고 결혼까지 했다. 그렇지만 세상은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시키는 대로 살았는데도 말이다.


“저는 30대 중반이 되었고 행복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앞으로 나는 어떤 희망을 가지고 있을까 했는데, 그저 내 아이들이 공부 잘하고 남편이 돈 잘 벌어오면 행복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거예요. 갑자기 그런 생각이 너무 끔찍해졌어요. 저는 저의 정체성을 찾고 싶었어요.”

그래서 그녀는 짐을 싸서 무작정 혼자 지방으로 내려갔다. 원해서 떠났지만 안정된 생활을 버리고 떠나는 것이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것이다. 지방에서 그녀는 우선 자기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무슨 이야기를 할까 고민했어요. 우선, 시간강사로 살아온 여성 직장인으로서의 나에 대해 생각했어요.그리고 아내로서의 나, 또 누구의 딸로서의 나에 대해 쓰기로 했습니다. 그 길로 소설을 써서 다시 서울로 올라왔죠.”


글을 쓰는 것은 자신을 치유하는 과정이라고 했던가. 그렇게 그녀는 소설을 쓰면서 자신을 치유해나가고 있다. 너무나 세상을 무겁게 받아들이는 그녀이기에 소설을 쓰는 것은 삶의 균형을 맞춰주는 일이기도 하다.

그녀의 소설이 우울하고 고독한 이유는 작가 자신이, 또 독자들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일거다. 상처는 헤집어 드러내고 햇빛에 잘 말려야만 치유된다. 바닥 끝까지 침잠해 가는 고독과 우울을 견뎌야만 바닥을 딛고 올라갈 수 있다. 어중간하게 물 속에 침잠해 있는 삶은 결국 존재를 질식시킨다. 그래서 그녀는 사람들이 자신도 모르는새 질식하지 않도록 자꾸 일깨워주는 각성제와도 같은 작가다.  


처음 그녀가 꺼낸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다.


그녀는 시애틀에서 2년 정도 살았다. 그 곳은 일년에 4,5개월을 빼고는 매일 화창한 날씨인데, 그 4,5개월 몰아서 비가 계속 내린다고 한다. 그 기간이 씨애틀에서 가장 자살률이 높은 시기인데, 반면에 독서율이 가장 높은 시기이기도 하단다.


“이것은 세상을 받아 들이는 태도를 말합니다. 오늘 나는 자살률이 높은 하루였나요, 독서율이 높은 하루였나요?”



 오산이 기자 (ymjang@naver.com)